[스크랩] 말의 형태와 내용,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이전에 말해야 할 필요를 만들어주세요.
말의 형태는 조음이라던가 문장의 구조, 그리고 표현의 질이 포함될 것입니다.
말의 내용에는 쓰고 있는 단어와 문장의 내용수준이 들어갈 것이고요.
수용언어가 높아질수록 표현언어도 늘어가지만 그래도 자폐성향이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인지 수준에 비해 언어능력이 현저하게 낮습니다.
(아스퍼거는 정상범위거나 오히려 높지만, 그 아이들이 쓰는 언어도 화용적으로 좀 기형적이지요)
승기도 빈약발화였기 때문에 언어치료사에게서 발화에서부터 단어학습, 예/아니오로 대답하는 것,
그리고 호명에 반응하는 것을 포함하여 오랫동안 언어치료를 받았어요.
그 시기는 승기의 조기교실과 유치원 시기와 맞물려 있는데, 글자를 익히고 아이들과 함께 학습하면서,
특히 몬테소리 교구로 구체물 학습하는 일을 좋아해서 학습적으로는 상당한 진전이 있던 시기입니다.
어느 순간 언어치료사 선생님이 엄마에게 요구하시는 내용이 많아지더군요.
집에서 이것 저것을 가르쳐달라, ~~을 해라...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치료실을 떠나 현장 일상생활에서 배우며 익힐 때라는 것을 말입니다.
제가 썼던 것은 승기가 흥미를 가지는 비디오, 책, 활동 등에서 쓸 수 있는 단어와 문장을 발췌하여
파악하고 그것을 다른 상황에서도 쓸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일반화'에서 약점을 가지는 이 아이들은 하나의 상황과 하나의 문장을 아예 연결지어 쓰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물이나 음료수를 먹고 싶은 아이가 반향어로 음료수 선전 광고문구를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혹은 의례적이고 의식적인 행동으로 특정한 표현을 계속적으로 하고, 상대방도 동일한 대꾸를 해달라고 요구할 때도 있구요.
저는 어린 아동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승기의 말도 '외국어 습득'처럼 이해하고 아이가 단어나 통문장으로 외워서 쓰고 있는 말들을
보다 적절하게 끊어서 의미를 파악하도록 돕고,
상황별로 쓰이는 문장을 마치 외국어 회화 책을 만들 듯이 기억해서 반복하여 연습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단어만으로는 그 수와 수준이 낮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승기의 다독/초독서증을 이용해서 승기가 알고 있는 그림이나 상황에 맞는 문장과 단어를 가르치는 일을 함께 하였지요.
그리고 그것이 낱개의 단어를 제시할 때 생기는 병폐-한 단어씩 끊어서 말하는 단조로운 말소리가 되지 않도록
일정한 문장 틀속에서 자연스럽게 대화 형식을 취하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가장 유용하게 쓰인 것은 가정의 일상생활이나 학습과 관련하여 각 위치나 준거의 범주(즉, 부엌, 화장실, 거실/동물, 학용품, 계절)에 따른 목록을 작성하고 그중에서 승기가 알고 있는 단어들을 확인하고
잘 못 알고 있는 단어를 교정해주며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아이가 읽고 있는 책이나 공부하고 있는 교재의 내용을 모두 파악하고 또한 아이의 일상 이동경로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요즘 배우고 있는 내용과 관련해서 새로 안내할만한 내용이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였습니다.
제가 대학원에 다니게 된 후에는 단어나 문장 목록을 점검할 때 언어치료자들이 쓰는 문장검사지 등에서도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 후에 나온 것이지만 학지사에서 나온 '혼자 할 수 있어요-일상생활 동작어 분석'도
아이가 알고 있는 내용을 점검하는데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이랑 앉아서 하루종일 학습만 했나보다 하시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아이가 쓰고 있는 문장들을 주의깊게 듣고 아이의 요구에 좀더 정확히 반응해줌으로써
아이에게 말할만한 의지를 만들어 주는 것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아이가 책을 읽고 있거나 비디오를 보자고 청할 때 어떻게 하면 좀더 많은 말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을까 궁리하고
짧게라도 아이와 이야기 할 수 있도록 스크립트를 짜보고 실천한 거죠.
그리고 그 수준을 자꾸 풍부하게 늘리도록 애썼구요.
저는 승기가 문장 쓰기를 싫어하고 잘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초등 저학년때 일기 쓰기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무릎에 앉혀놓고, 혹은 거실 바닥에 함께 누워서 함께 놀면서
질문하고, 대답하고, 나온 이야기들을 문장으로 다시 말해주는 식으로 말로 하는 '나름 일기'를 함께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은 것은 에니메이션 세계 명작동화입니다.
글자보다는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라 어느 순간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특히 떨어지거나 쫒기는 장면을 좋아해서
깔깔거리며 책보는 일을 좋아했는데, 제가 책 읽어주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길래
그림을 위주로 읽어주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책을 읽어주었고,
아는 단어를 하나씩 손으로 짚어주며 놀이삼아 물어보고 확인하고서 격려하는 놀이도 함께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들어있는 테이프 교재도 활용해서 혼자서 책을 들으며 읽는 일도 연습하게 했습니다.
여전히 문장 수준이 낮은 승기이지만 일상생활을 해가면서 겪는 어려움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마 중학교 고학년때는 지금보다도 좀더 유연하게 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해가 갈수록 말의 형태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할 내용이 없으면 아이의 말은 단순한 외국어 회화만 배운 이의 말처럼 단조로울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 말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좋은 관계를 경험하였고,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보다 정확한 내용의 말, 따스한 품성이 묻어나오는 말을 합니다.
얼마전 끝난 여름 방학 중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제가 시간이 없어 아빠가 승기를 데리러 갔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승기는 아빠랑 집에 오기전에 윗층으로 다시 올라가자고 하더랍니다.
자원봉사자 누나들이 있는 방에 들어간 승기는
"승기 보고 싶을 거야, 그렇지? 다음에 다시 만나렴"라고 '나름 인사'를 하고 나오더랍니다.
그동안 감사하였다, 다음에 뵈면 더 좋겠다라는 유려한 인사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수고했던 선생님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